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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김장김치입니다.
요즘은 마트에 가면 여러 종류의 김치를 쉽게 살 수 있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전국 어디에서 만든 김치든 집 앞까지 배달됩니다. 김치냉장고가 있으니 한 번 담근 김치를 오랫동안 보관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릴 때 기억하는 김장철 풍경은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김장이 특별한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오면 어느 집이나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야 마당에 멍석을 펼치고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함께 배추를 버무리던 그 시간이 참 귀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김장철이 다가오면 김치 맛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당에 멍석을 펴면 시작됐던 김장 품앗이

 

김장하는 날 아침은 평소와 조금 달랐습니다.
마당에는 커다란 멍석이 펼쳐지고, 어머니와 누나를 비롯해 친척들과 이웃 아주머니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열 명 남짓 되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당신은 이것을 하세요”라고 정해준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였습니다.
한쪽에서는 소금에 절여놓은 배추를 찬물에 씻었습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배추는 어린 제가 보기에도 상당히 무거워 보였습니다.

배추와 무를 옮기는 일처럼 힘이 필요한 일은 주로 남자들이 맡았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커다란 빨간 바구니가 놓였습니다.
그 주변으로 네댓 명이 둘러앉아 절인 배추를 한 포기씩 펼치고 배춧잎 사이사이에 빨간 김장 양념을 발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집 김장을 도와준 사람들이 며칠 뒤에는 다른 집에 모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집에서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도 그 집 김장을 도우러 갔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 다음에는 이웃집.
그렇게 김장철이면 사람들이 집집마다 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김장 품앗이였습니다.
어릴 때는 너무 당연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돈을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의 힘든 일을 나누었던 꽤 단단한 공동체였습니다.
국가유산청의 김장문화 자료를 찾아보면서 조금 놀랐습니다. 김장 전날부터 가족과 이웃이 참여해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준비하고, 김장하는 날에는 함께 모여 절인 채소에 양념을 버무리는 모습이 제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풍경과 무척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만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 시절 많은 집에서 비슷한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치냉장고 대신 땅에 묻었던 장독

 

김장이 끝났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큰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당에 장독을 묻는 일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어른들이 왜 힘들게 땅을 파서 장독을 묻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겨울이면 으레 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 집에서도 김장을 하면 땅을 파서 서너 개 정도의 장독을 묻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처럼 김치냉장고가 없었으니 잘 버무린 김치를 장독에 차곡차곡 담아 겨울 동안 보관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자연조건으로 음식 보관에 이용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토굴 같은 공간을 저장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에게 그런 원리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장독에서 꺼낸 김치가 참 맛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삭하면서 시원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맛이 조금씩 깊어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기억입니다. 요즘 김치냉장고도 온도를 세밀하게 조절해 김치를 훌륭하게 보관합니다.

옛날 장독 김치가 과학적으로 무조건 더 맛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김치를 먹었는데도 겨울날 마당에 묻어둔 장독 뚜껑을 열고 꺼내 먹었던 그 김치의 맛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김치 맛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겨울까지 함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장이 끝나면 기다리던 따뜻한 수육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김장에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음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수육입니다.
배추를 씻고 무를 다듬고 양념을 만들고, 수많은 배추에 양념을 바르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습니다.
찬물에 계속 손을 담갔으니 손은 차가웠고, 오랫동안 앉아서 배추를 버무린 어른들은 허리도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렇게 김장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면 부엌에서 따뜻하게 삶은 돼지고기 수육이 나왔습니다.
잘 삶아진 고기를 먹기 좋게 썰어 접시에 담고 그날 막 버무린 새 김치를 길게 찢어 수육 한 점에 올렸습니다.
따뜻한 고기와 아직 익지 않은 아삭한 김치.
그 조합이 참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수육이 그렇게 맛있었던 이유가 꼭 요리를 잘해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한자리에 둘러앉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수육 한 점에 김치를 얹어 먹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일하고, 일이 끝나면 같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제 기억 속에서는 수육 한 접시가 김장의 진짜 마무리였습니다.
저도 수육을 좋아해 여러 방법으로 직접 만들어왔습니다. 그러다 지금은 제 입맛에 가장 잘 맞는 방법 하나에 정착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제대로 한번 풀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그리운 것은 김장보다 그날의 사람들입니다


요즘 김장 풍경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마트에는 맛있는 포장김치가 많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김치를 직접 담그더라도 절임배추를 주문하면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김장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변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족의 수가 줄었고 사는 공간도 달라졌으며 모두 바쁘게 살아갑니다. 예전 방식 그대로 김장을 해야만 우리 문화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국가유산청 자료에서도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가족과 이웃이 함께하던 공동체적인 음식문화가 점차 줄어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김장문화의 가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김치와 김장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됐습니다. 김치를 만드는 조리법 하나만이 아니라 함께 만들고 나누며 이어온 문화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사람들이 김치를 사 먹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정말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김장을 핑계로 사람들이 모였던 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그 모든 것이 너무 평범해서 특별한 줄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김장은 단순히 겨울에 먹을 김치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의 집을 오가며 안부를 묻고, 일을 나누고, 음식을 함께 먹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김장김치에 따뜻한 수육 한 점을 올려 먹을 때면 오래전 우리 집 마당이 떠오릅니다.
마당에 펼쳐놓은 멍석, 한쪽에 쌓여 있던 배추와 무, 찬물에 손을 담그던 어머니와 누나, 빨간 바구니 주위에 둘러앉아 양념을 바르던 사람들, 그리고 일이 끝난 뒤 함께 먹었던 따뜻한 수육까지.
그날 먹었던 김치의 정확한 맛은 이제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음식에는 맛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음식에는 사람이 있고, 계절이 있고,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한 숟갈의 온도’의 첫 번째 이야기를 김장으로 시작한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직접 먹어보고 만들어본 음식,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음식, 그리고 그 음식과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한 숟갈의 음식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담겨 있으니까요.

 

📌 참고자료

국가유산청, 「절이고 묵히고 삭히고 발효 음식은 문화다」
2026년 7월 1일
글: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음식인류학) / 자료: 국가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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